2012 GIMPAF ' Ryu Jae Hong 유재홍 ' Art Critique 평론
조건(들): ‘2012년 ‘광주국제미디어퍼포먼스아트 페스티벌’
‘아시아문화중심도시’라는 공허한 구호가 도처에서 난무하는 광주에서 섬광 같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란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면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는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공정이다. 어쩌면 몇몇 관객들은 2012년 9월 초 ‘광주국제미디어퍼포먼스아트 페스티벌’에 참가한 몇몇 작가들의 제스처에서 발현됐던 섬광 속에서 이 진리의 공정을 목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광주국제미디어퍼포먼스아트 페스티벌’의 칭송이나 비판이 이 짧은 글의 목표가 아니다. 이 글은 이 예술적 사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몇 가지의 성찰과 관계한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그것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장 적게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헤겔의 지적을 떠올려 보자. 예술 —‘퍼포먼스 아트’는 예술의 다른 이름이다—을 무(無)에서의 창조(création ex nihilo)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공허한 희원에 불과하다. 예술은 조건에 반응하는 것이다.
예술을 탈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어떤 주제든지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매체를 통해 하나의 현실을 표현하는 예술체제는 19세기 무렵 서구에서 탄생한다. 과학․철학혁명, 정치․경제혁명과 예술혁명이 하나의 단위(unity)였던 시절이 있었다.
서구인들이 르네상스 또는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태동하여 2-3세기에 걸쳐 진화를 거듭한 이 세 가지 운동은 19세기 언저리에 서로 대립각을 세운다. 과학․철학 혁명은 합리적 주체를 생산하고 정치․경제혁명은 민주주의(인민주권)와 시장체제를 낳으며, 예술혁명은 이 두 분야에 대항해서 인간의 내면적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두 체제—민주체제와 시장체제—를 역사적 진보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체제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보이는 또다른 결과를 야기한다. 민주체제는 원자화된 무수한 인간들을 생산하며, 이들을 물신 숭배자로 만드는 시장체제는 삶의 수많은 가능성을 차단시킨다. 이 두 체제와 함께 현대 예술이 부상한다. 보들레르는 ‘우울’(spleen)이라는 은유로 원자화된 인간의 조건을 노래하면서 새로운 예술의 서막을 알리고, 헤겔은 이 원자화된 인간을 이유로 예술의 종말을 시사한다. 이 두 조건이 강제하는 인간 내면의 지형을 통찰하는 직관 때문에 시인이 철학자보다 우월한 것일까? 감성의 혁명을 주재하는 낭만주의나 예술의 자율성이 극에 치닫는 모더니즘은 결코 자생적인(sui generis) 사조들이 아니다. 색채의 혁신을 주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붓질은 시장의 첨병인 기술과학이 고안한 기법 (니엡스와 다게르의 사진 기술)이 강제한 제스처였다.
현대 예술은 무수한 변주를 통해 그 형태를 달리하지만 이 두 조건의 영향력은 변치 않으며, 오히려 더 비대해진다. 우리는 예술(들)의 경계, 또는 예술의 해묵은 개념을 폐기하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대사건을 기억한다. 창작 행위에 대한 성찰, 재료의 중요성, 작가의 지위, 예술 장르의 구분, 관객의 위상, 전시행위, 작품의 지속성 등, 예술 자체 혹은 (예술적) 삶에 대한 총체적 질문으로 해석될 수 있는 뒤샹의 ‘샘’은 콘템퍼리 아트의 등식을 성립시킨다. 미학적․ 정치적 전언의 담지체로서 작품의 개념이 파기되며, 반예술이 예술이 될 정도로 예술의 외연은 확대된다. 워홀의 ‘통조림’이나 “누구나 예술가이며 무엇이든지 예술의 오브제다”라는 요셉 보이스의 지적의 이면에는 커질 대로 커진 시장의 위상과 ‘표현하는 주체들’의 대량적인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19세기에 예고 됐듯이 시장체제는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인들을 양산한다. 제2차 대전 후 북미와 서구의 급속한 산업화는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될 젊은 세대들을 생산하는데, 이들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지적․경제적․성적․정치적․의학적 조건 확연하게 바뀐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이들은 선진 자본주의, 이른바 후기 산업국가들에 거주하는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풍요로운 세대들, 잘 교육받은(?) 개인들, 물질적 안전을 확보한 무수한 여가 인간들이다.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사랑, 욕망, 고독, 자유 등과 같은 새로운 가치들이 세상을 엄습한다. 이것은 기능인들의 양산을 목표로 삼았던 시장체제의 역기능과 같은 것이었다. 이 새로운 표현 주체들은 세상과 타인들에게 어느 것도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개인들, 전통적 코드에 입각하면 부정적 개인들, 역설적으로 풍요라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견딜 수 없는 고독(자유) 속에서 존재의 밑바닥에 닿으려고 시도하는 개인들이다. 이들이 자신만의 표현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인지 모른다. 표현의 영역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이러한 표현의 홍수 속에서 예술가는 더 이상 예술가라는 낱말은 전유하지 못한다.
우리는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테크노 유토피아 시대의 표현 주체들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이들은 스펙터클의 충실한 추종자들이며 미디어, 시뮬라시옹의 세계, 또는 소리, 이미지와 문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비트와 디지털 이미지에 하부기초를 둔 정보영상에 매료되면서 감각적․심리적 세계를 건축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시장이 제공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글과 이미지로서 자신들의 공간을 정성스레 꾸미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회원들, 지리적 공간들을 넘나들며 자신들의 궤적을 그리는 새로운 노마드들, 이념을 경시하는 미시정치의 인간들, 디지털 언어와 이미지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제작하는 자르기-붙이기의 달인들인 새로운 다다이스트들을 여기저기에서 목도한다. 워홀이 암시했던 키치 세계의 현실화가 실현된 것인가?
무수한 표현 주체들과 테크놀로지에 입각한 시장은 예술의 존재론적 위상을 통째로 뒤흔드는 것일까? 어쨌거나 인류는 문자의 발명이나 인쇄물의 보급에 버금가는 대변혁기를 관통하고 있다. 리오타르는 20세기의 지식의 위상을 묻는『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나 불신으로 이 시대를 규정한 바 있다. 서구가 발명했던 ‘현대’를 상기해 보자. 이른바 계몽의 기획의 골간은 지식의 빛으로 문명화된 인간과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폭력의 원천인 사회적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한 만인의 교육(지식의 습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에 군림하는 커뮤니케이션, 메스 메디아, 컴퓨터 과학을 통한 지식의 외화 등은 개인의 지식 습득을 방향지우고, 마치 상품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처럼 지식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를 성립시킨다. 지식은 정보 상품이 되어 도처에서 소비자-인간을 유혹한다. 합리적 주체로서의 해방된 인간과 보편적 정신의 역사라는 두 거대 담론을 인공지능이나 기계 번역이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이 진입한 셈이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난무하는 표현 속에서 예술은 실체 없이 떠도는 유령이 된 듯하다. 헤겔이나 단토(미메시스의 위기, 네러티브의 부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조건들 속에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이 철저하게 포획돼 있다. 예술가에 속했던 ‘창조’나 ‘상상력’이라는 낱말은 이제 경영인들의 용어가 되었고, 이 경영인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군림하며 세상을 지휘한다. 시장 주체들의 담론은 예술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담론이 된다. 정치=경영, 과학=기술과학, 사랑=섹스, 예술=문화상품의 등식이 성립된다. 전지구적․영속적․즉각적․비물질적 속성을 지닌 시장은 자신이 지배하는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통해 모든 행위(정치, 재정, 상업, 문화·예술, 미디어)를 자극하고 지원하며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인간을 규정한다. 예술은 한낱 이 체제의 한 부속물로 전락한 듯하다. 허스트의 For the Love of God이 5천만 파운드에 팔리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쿤스나 허스트는 구매자들이 ‘예술 시장’ 시대의 첨병으로 선언한 예술가들이다. 구매자의 힘이 예술가의 그것을 앞서고 있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면, 예술은 조건(들)과 무관한 탈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예술은 자신을 부속물로 삼으려는 ‘시장’과 이 시장이 생산하고 그리고 이 시장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표현 주체들의 대량적인 등장’이라는 두 조건에 놓여 있는 유기체이다. 서두에서 말했던 ‘광주국제미디어퍼포먼스아트 페스티벌’의 지속 가능성은 바로 이 조건들에 대한 성찰과 관계한다. 역사는 무임승차를 용납하지 않는다.
19세기의 한국은 서구에서 일어난 과학․철학, 정치․경제와 예술 혁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상호간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세기의 한국은 예술과 예술가들의 외연을 확장시킨 경계의 폐기나 풍속 혁명을 경험하지도 동참하지도 않았다. 21세기의 한국은 불현듯 예술=문화 상품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세계화의 구성원이 됐으며, 그것이 야기하는 인간의 삶과 예술의 지형에 대해 무지한 듯하다. 순응과 모방은 조건(들)에 대한 분석과 진단이 없는 곳에서 성행한다. 전근대적인 것, 현대적인 것 그리고 탈현대적인 것이 아무런 성찰 없이 혼재하는 곳에서 단순한 행사가 아닌 하나의 예술적 사건을 갖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과 같은 것이다. 퍼포먼스 아트는 하나의 형태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의 사건(pro forma / per forma)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고집스럽게 수용하면서,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지리멸렬한 예술적 삶을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무에서의 창조’는 한갓된 환영이다. 고통스런 몇몇 선택들이 남아 있다. 누구나 예술가라는 사실을 긍정하면서, 예술을 시장의 부속물로 인정할 것인가? 시장에 편입된 것은 인정하지만, 그 속에 자신만의 탈주선을 그릴 수 있다는 해묵은 자부심으로 예술적 행위를 계속할 것인가? 급진적이긴 하지만, 예술의 종말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로서 예술적 행위를 계속해서 영위할 것인가? 또다른 선택도 있다. 그것은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시장체제에 맞선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새로운 과제들, 이를테면 기술과학과 인간의 관계, 생태 위기 속의 인류, 자연과학적 발견에 근거한 새로운 거대 담론 등에 뛰어드는 것이다. 조건들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의 극복을 시도하는 ‘광주국제미디어퍼포먼스아트 페스티벌’을 상상해 본다.
(2012/10/28 유재홍)
'INTERNATIONAL ART FESTIVAL > 2012 GIMPAF'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 GIMPAF . Review by Coordinator Kim Yul Ha (0) | 2015.09.30 |
---|---|
2012 GIMPAF ' Review by Coordinator Kim Min Ji (0) | 2015.09.30 |
2012 GIMPAF 'Yun Jang Hyen ' Greeting (0) | 2015.09.30 |
2012 . GIMPAF / 9th Sep / Media X Gallery (0) | 2015.09.29 |
2012 . GIMPAF / 9th Sep / Gwangju Biennale (0) | 2015.09.29 |